영조대왕 약식동원 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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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의 밥상에는 약이 숨어 있었다

― 조선 최장수 왕 영조의 ‘약식동원(藥食同源)’ 장수 밥상

[건강밥상] 칼럼 · 한방조아


여든셋, 임금에게는 기적이었던 나이

조선의 임금들은 좀처럼 오래 살지 못했다. 스물일곱 분의 왕 가운데 환갑을 넘긴 이는 손에 꼽을 정도였고, 평균 수명은 채 쉰을 채우지 못했다. 가장 좋은 옷이 지어지고, 가장 귀한 약재가 모이며, 천하의 진미가 다 올라오는 자리에 앉아서도 그러했다. 권력의 정점이 곧 건강의 정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오히려 넘치는 음식과 끊이지 않는 정무, 깊은 밤까지 이어지는 긴장이 임금들의 몸을 갉아먹었다.

그 틈에서, 홀로 여든셋까지 산 임금이 있다. 영조다.

여든셋이라는 숫자는 오늘날에도 적지 않은 나이지만, 평균 수명이 마흔을 겨우 넘기던 18세기 조선에서는 그야말로 기적에 가까웠다. 게다가 그는 단지 오래 숨만 붙어 있던 것이 아니었다. 일흔이 넘어서도 흰머리가 거의 없고 피부가 맑았다고 전한다. 쉰두 해라는, 조선 왕조에서 가장 긴 재위 기간 동안 탕평과 균역의 개혁을 밀어붙일 만큼 정신도 또렷했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오래, 그리고 건강하게 살게 했을까. 영험한 단약이었을까, 비밀스러운 보약이었을까. 답은 뜻밖에도 거창한 곳에 있지 않았다. 그것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그의 앞에 놓이던 평범한 밥상 위에 조용히 숨어 있었다. 화려하지 않았으나 빈틈이 없었고, 소박했으나 그 안에 약(藥)을 품은 밥상. 옛사람들은 그것을 일러 약식동원, 약과 음식의 뿌리가 본디 하나라 하였다.


다섯 번을 세 번으로 — 덜어냄의 지혜

영조의 밥상을 이해하려면, 무엇을 올렸는가보다 무엇을 덜어냈는가에서 시작하는 편이 옳다.

본래 조선의 임금은 하루에 다섯 번 상을 받았다. 이른 아침의 초조반(初早飯)에서 시작해 아침 수라, 낮것상, 저녁 수라, 그리고 밤참에 이르기까지. 임금의 하루는 끊임없이 차려지고 물려지는 상들로 채워졌다. 그러나 영조는 이 다섯 번을 과감히 세 번으로 줄였다. 임금에게 허락된 풍요의 절반 이상을 스스로 내려놓은 것이다.

덜어내되, 흐트러뜨리지는 않았다. 영조는 대신들과 머리를 맞대고 국정을 논하다가도 식사 시간이 되면 회의를 멈추고 수라부터 받았다고 한다. 정무가 아무리 급해도 끼니의 시각만은 어기지 않았다. 다른 임금들이 아침을 부득이 거르거나 늦은 밤 출출함을 야식으로 달래며 식사 리듬을 흩뜨릴 때, 영조의 하루는 늘 같은 시각, 같은 양의 밥으로 단정하게 채워졌다.

상에 오른 밥 또한 단출했다. 윤기 흐르는 흰 쌀밥 대신, 현미와 보리와 흑미와 콩을 섞은 거친 잡곡밥. 기름진 고기를 앞세우기보다 제철에 난 채소를 곁에 두었다. 아침에는 부드러운 죽 한 그릇, 점심과 저녁에는 밥과 김치, 시금치와 청경채 같은 나물, 그리고 약간의 장류면 족했다.

오늘날의 언어로 옮기면 이렇다. 소식(小食), 규칙적인 식사, 통곡물 위주의 식단.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그러나 좀처럼 지키지 못하는 그 원칙들을 영조는 삼백 년 전에 묵묵히 실천하고 있었다.


입맛을 잃은 노왕과 ‘밥상의 네 보물’

그렇다고 영조의 밥상이 풀과 잡곡만으로 차려진 금욕의 식탁이었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절반만 아는 것이다.

『승정원일기』 영조 44년(1768년) 7월 28일. 일흔을 훌쩍 넘긴 노왕이 내의원 도제조 김용택과 마주 앉아 이런 말을 남겼다.

“나이가 들면서 입맛을 잃은 줄 알았는데, 송이버섯과 날 전복과 새끼 꿩과 고추장이 있으면 밥을 잘 먹는다. 내 입맛이 아주 망가진 것은 아니다.”

소식하던 임금의 입을 끝내 열게 한 네 가지. 후세 사람들은 이를 영조의 ‘밥상의 네 보물’이라 부른다. 향이 깊은 송이버섯, 바다의 정기를 머금은 전복, 기름기 적고 담백한 꿩고기, 그리고 갓 등장한 신문물 고추장.

흥미로운 것은 이 네 가지가 결코 입만 즐겁게 하는 사치품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전복은 예부터 기력을 보하는 귀물로 여겨졌고, 꿩고기는 살이 무르고 담백해 소화가 쉬웠다. 치아가 약했던 영조에게는 더없이 알맞은 음식이었다. 그는 “어머니는 절편과 병자(餠炙)를 좋아하시는데, 나는 치아가 약해 먹지를 못한다”고 토로한 적이 있을 만큼 이가 부실했다. 부드럽고 담백한 전복과 꿩은 단순한 별미가 아니라, 노왕의 몸에 맞춘 ‘약이 되는 음식’이었던 셈이다.

고추장은 또 어떠한가. 지금이야 어느 밥상에나 오르는 흔한 양념이지만, 영조의 시대에는 사정이 달랐다. 고추장이 문헌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이 1720년 무렵, 어의 이시필의 『소문사설』에서였으니, 영조에게 고추장은 갓 세상에 나온 진귀한 발명품이었다. 제조법도 널리 퍼지지 않아 때로는 약재처럼 다루어지던 귀물. 노왕은 그 붉고 매콤한 새 맛에 반찬을 찍어 먹고, 때로는 밥에 쓱쓱 비벼 한 그릇을 비웠다고 한다.

소박한 밥상 위에 놓인 네 가지 보물. 그것은 사치가 아니라, 입맛 잃은 노년의 몸을 다독이는 영조 나름의 처방이었다. 약과 음식의 뿌리가 같다는 말이, 바로 이 밥상에서 조용히 증명되고 있었다.


“전복 한 마리도 백성에게는 짐이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빛나는 대목은 그다음에 있다.

영조가 전복을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도제조가 곧바로 아뢰었다. “그러면 생복(生鰒)을 따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좋아하시는 음식이니 마땅히 더 갖추어 올리겠다는, 신하로서 당연한 말이었다.

그러나 영조의 답은 뜻밖이었다.

“영의정이 호남 어사로 있을 때, 큰 전복 한 마리 따는 것도 백성에게는 폐가 된다고 하였다.”

그러고는 더 가져오지 말라 일렀다. 때는 영조 44년, 임금의 권세가 하늘을 찌르던 시절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바다의 전복을 모두 상에 올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 앞에서 오히려 멈춰 섰다. 전복 한 마리를 따기 위해 바닷속으로 들어갈 백성의 수고를, 노왕은 잊지 않았다.

좋아하되 탐하지 않는 것. 누릴 수 있으나 절제하는 것. 영조의 밥상이 단지 ‘오래 사는 밥상’을 넘어 ‘품격 있는 밥상’이 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건강이 몸을 위한 절제라면, 이 한마디는 마음을 위한 절제였다.


삼 일에 한 번, 의원을 부른 임금

밥상 밖의 이야기 하나를 덧붙이자. 영조의 장수에는 식습관 못지않게 중요한 비결이 또 하나 있었으니, 바로 ‘꾸준한 점검’이다.

기록에 따르면 영조는 재위 52년 동안 내의원에서 무려 7천 회가 넘는 진료를 받았다. 한 달에 열한 번 남짓, 사흘에 한 번꼴로 자신의 몸 상태를 살핀 셈이다. 작은 이상도 그냥 넘기지 않고 부지런히 들여다본 것이다. 오늘날로 치면 ‘정기 검진의 달인’이라 할 만하다.

좋은 밥을 규칙적으로 먹고, 제 몸을 부지런히 살피고, 좋아하는 것 앞에서도 절제할 줄 알았던 임금. 그의 장수는 우연이 아니라, 매일의 작은 습관이 쌓아 올린 성실의 결과였다.


오늘의 밥상에게 묻는다

신하들이 장수의 비결을 묻자, 영조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입고 먹는 것이 후하지 않은 것이 곧 보람이다.”

화려하지 않아도 좋다는 말이다. 넘치지 않아도 충분하다는 말이다. 거친 잡곡밥과 제철 채소, 그리고 가끔의 담백한 전복과 꿩 한 점. 약이 되는 음식을 약처럼 귀히 여기되, 한 끼의 절제를 잊지 않았던 노왕의 밥상은 삼백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에게 묻는다.

오늘 당신의 밥상은 무엇으로 차려졌는가. 그 위에는 약이 숨어 있는가, 아니면 과함만이 놓여 있는가.

영조의 장수 밥상이 일러주는 답은 의외로 간결하다. 소박하게, 규칙적으로, 그러나 때로는 몸을 위해 정성스럽게. 약과 음식의 뿌리는 본디 하나였으니, 가장 좋은 보약은 늘 우리의 밥상 위에 있었다.


※ 이 칼럼에 인용된 영조의 발언과 일화는 『승정원일기』(영조 44년 7월 28일 등)와 관련 문헌 기록에 근거합니다. 음식의 건강 효능에 관한 서술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내용으로, 의학적 진단이나 처방이 아님을 밝힙니다.

한방조아 · 건강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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